1924년 다나카 조선철공소(출처·부경근대사료연구소)
1926년 나카무라 조선소 진수식(출처·부경근대사료연구소)
한국근대조선발상유적비
대평동 서쪽해안에 자리 잡은 조선소들과 주변 지역
“대평동은 대한민국 조선 1번지다.” (조선소와 대평동)
대평동이 수리조선업으로 유명세를 떨칠 수 있게 된 계기는 18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한말 시기, 일본 어민들은 조선의 황금어장을 차지하기 위해 부산으로 건너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일본인들은 풍량을 피하기 적합했던 대풍포(깡깡이마을의 옛 이름)를 어선을 수리하고 식수를 공급 받는 포구로 이용합니다. 그러던 1887년, 우리나라에 진출한 일본인 조선업자 ‘다나카’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공장’을 설립합니다. 현재 영도 대평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진 다나카 조선공장은 동력을 바람이 아닌 발동기를 통해 얻는 근대식 목선을 제조하는 공장이었습니다.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영도에 들어선 수리조선소와 조선관련 업체는 무려 60개소 정도였습니다. 해방 이후 다나카 조선소를 비롯해 대평동에 있던 조선소를 불하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대평동을 7~80년대 수리조선업의 메카 로 성장시켰습니다.
대평동 영도경찰서 뒤편 물양장 풍경
1910년대 영도 남항 풍경(출처·부경근대사료연구소)
“대평동은 1970~80년대 부산에서 2번째로 세금을 많이 낸 곳이다.” (원양어업과 대평동)
해방 이후 대평동은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그러던 마을이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1970년대 초반 불어 닥친 ‘원양어업 붐’ 에 의해서입니다. 대평동 성주철재 이영완 사장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마을에는 하루에도 4백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드나들었으며, ‘선원모집센터’ 앞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부두에서는 어부들이 돈 대신 참치를 끌고 와 밥값, 술값을 계산했으며, 집집마다 냉장고에 ‘○○수산 캔 통조림’이 넘쳐났고, 선술집인 니나노집이 길목마다 하나씩 들어섰으며 다방만 30군데에 달하는 파시(波市)를 이뤘다.”고 합니다. 이때 대평동은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닐 정도’ 였다고 회자될 만큼 경기가 좋았습니다.
수산업계의 호황은 대평동의 조선업계에도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972년 1만 8천 톤급 선박 건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선박 건조가 시작됐고, 1980년대에는 국산 엔진을 제작해 수출에 나섰습니다. 당시 2백여 개소의 철공소, 선구점, 전기업체, 부품상이 들어선 대평동은 ‘한국 최고의 선박수리기술’을 자랑하는 지역으로 성장했습니다. 당시를 떠올리며 마을 주민 대다수가 “대평동이 부산에서 세금을 두 번째로 가장 많이 낸 곳이었다.” 고 말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과언이 아닐정도로 70~80년대는 대평동 최고의 전성기었습니다.
인용_김정하(근대산업화기 여성근로자의 산업민속 - ‘조선소거리’의 ‘깡깡이 아지매’를 중심으로)
섬에 가까운 지형이었던 대풍포(17세기 후반 초량 지회도)
“대평동은 다른 이름이 3개 있다.” (마을 이름의 유래)
대평동의 본래 명칭은 ‘풍발포(風發浦)’ 였습니다.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찬 형세’라는 뜻을 지닌 이 명칭은 영도구의 중심축이자 영험한 기운을 자랑하는 봉래산의 지맥이 힘차게 뻗어나가 깡깡이마을에 닿아 강한 기운을 발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풍포(待風浦)’ 라 불렸습니다. 당시 깡깡이마을은 비나 풍랑을 피하기 좋은 포구여서, ‘기다리다, 대비하다’라는 뜻의 한자 ‘대(待)’자와 바람 ‘풍(風)’, 포구 ‘포(浦)’자를 써서 ‘바람을 대비하는 포구’라는 의미로 대풍포라 불렀습니다. 해방 이후 일제식 동명을 정리하면서 ‘대평동’으로 바뀌게 됩니다. 풍랑이 없이 평안하길 빈다는 의미 에서 대평동 이라 불렀습니다.
1981년 대평동마을회가 정식 출범한 이래로 60년 이상 대평동으로 불려오던 마을은 1998년 인구수의 감소와 행정적 편의를 고려해 남항동으로 편입되면서 이제 대평동이라는 명칭은 법정동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평동 주민들은 자신들을 대평동 사람으로 소개할 만큼, 대평동이라는 마을이름에 애착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5년 부산시 예술상상마을 공모에 대평동이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대평동은 이제 ‘깡깡이예술마을’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리조선마을인 대평동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깡깡이’라는 이름을 중심에 두고 근대산업유산을 보존하고 지역주민과 예술가가 소통하는 문화예술마을로 재도약하고 있습니다.
영도 대풍포 매축비
“부산목의 섬 마키노시마(주갑도)를 바라보다”(출처·배석만, 대평동 조선소와 철공소 이야기)
1905년 중구에서 바라본 대풍포(출처·부경근대사료연구소)
“원래 대평동은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매립지 대평동)
아주 오랜 옛날, 대평동은 현재 영도구 남항동 앞바다에 위치한 섬이었습니다. 점차 섬과 육지 사이에 퇴적물이 쌓여 육지와 연결되면서 돌출된 반도 형태의 땅이 되었습니다. 낚싯바늘처럼 생긴 반도 안쪽은 잔잔한 호안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사츠마(가고시마의 옛 지명) 수군들이 군선을 숨기기 위해 해안을 준설해 포구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곳을 ‘사츠마보리(살마굴)’라 불렀으며 한일 관계에서 화해와 교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절영도왜관’이 있던 곳도 바로 이곳이라고 합니다.
대평동의 해안선은 1916년 착공해 1926년까지 이뤄진 ‘대풍포매립공사’ 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본인 자본가 오자와는 일본인 부산거류민단에서 매립권을 양도 받아 대풍포 일대의 바다를 매립합니다. 10년간의 매축공사로 40,200평의 땅이 생기게 되자 일본인 주택가가 형성되었고 대풍포 해안을 따라 일본 조선소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대평동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이뤄진 ‘영도대교 부속공사’ 로 현재의 해안선과 가까운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당시 공사로 대평동은 두 곳의 선착장이 생겨 선박을 정박할 수 있는 면적을 늘어났고 대평동 동측은 자연적인 해안선을 매축하여 수출입 및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한 시설로 정비하였습니다. 1939년이 되면 또 한 번 매축이 되어 두개의 물양장이 완전히 분리된 현재 대평동의 지형이 완성되게 됩니다.
대평동 이까선창 풍경

“대평동은 오징어가 풍년인 포구였다.” (어장 대평동)
일제강점기 영도는 부산의 주요 어장 중 하나로, 특히 오징어와 갈치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징어잡이 배들이 대평동 물양장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현재 대평동에는 두 군데의 물양장이 있는데, 남항 국제선용품유통센터 가 있는 물양장을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지금까지 ‘이까선창(또는 자갈언덕을 의미하는 몽디를 붙여 이까몽디라고도 불렀음)’이라 부릅니다. ‘이까’는 일본어로 ‘오징어’를 뜻하는데 그만큼 대평동으로 들어오는 오징어가 많았던 것입니다.
대평동에서 나고 자란 한 소설가의 글에서 당시 포구의 풍경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물류창고에 보관해둔 오징어가 나가는 날이면 동네잔치나 다름없었다. 오징어가 몇 트럭씩 줄지어 나갔다. 그럴 때, 날쌘 아이들이나 큰 오빠들이 트럭 짐칸에 뛰어올라 오징어를 훔쳤다. 웬일인지 트럭은 덮개도 씌우지 않고 오징어가 노출된 채 천천히 지나갔다. 트럭에 오른 오빠들은 오징어를 뭉텅 뭉텅 집어서 땅바닥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트럭이 삼거리에 있는 파출소를 지나가기 전에 뛰어내렸다. 운전기사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묵묵히 차를 운전할 뿐이었다. 우리는 별 죄책감도 없이 훔친 오징어를 아프도록 씹어 먹었다.”
― 소설가 정우련의 글 중에서
대평동 1가에 위치한 선일인쇄 주인 강장수 씨는 1948년생으로 국민학교 1학년 때 겪은 한국전쟁부터 대평동의 역사를 지켜본 이 중 한 명입니다.
“이까몽디에는 오징어 배가 참 많았는데 오징어 배나 멸치잡이 배가 와서 그물을 털었지. 거기서 튀어 나오는 건 모두 우리가 갖는 거였어. 아버지가 배를 하셨었는데 배가 잘 안될 때는 경희목재 앞 귀퉁이 땅을 돈주고 빌려서 오징어를 말렸지. 오징어를 널어놓으면 그걸 가져가는 도둑이 그렇게 많았어. 어머니가 호롱불을 키고 밤마다 지켰지. 어떤 날은 도둑들이 가마니를 가져와서 오징어를 두 가마니나 담아 가버렸어. 그때 어머니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가져갔나보다 하며 마음을 달래셨어.”
― 대평동 주민 강장수 씨 인터뷰 중에서
하지만 한미어업협정으로 선박 수가 줄어들면서 차츰 대평동에서도 오징어는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이까선창이라는 이름만이 주민들 입으로 전해져오며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거리를 사이에 두고 조선소와 마주보고 있는 이북동네
왼쪽-이북동네 공동화장실 / 오른쪽-이북동네의 좁은 골목길
1952년 용두산에서 바라본 대평동(출처·부산시립박물관)
“대평동에는 6.25 피난민들이 살았던 이북동네가 있다.” (피난민과 대평동)
한국전쟁 시기 대한민국 인구의 1/3이 피난민이 되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영도에는 미군 물자로 만든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도 피난민이 더 많았습니다. 피난민 중에는 이북 출신도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 대평동에도 이북지역, 특히 함경도에서 온 피난민들이 모여 살아 ‘이북동네’ 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북동네에는 가로로 기다란 집이 있는데, 한 지붕 아래 여러 개의 방이 있어 각 방마다 서로 다른 가구가 거주하는 특이한 가옥생활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꼬방(상자같은 작은 집)’ 하나를 얻어 네 식구, 다섯 식구가 한 방에서 생활하던 당시 피난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한 지붕아래 살다보니 집을 보수하려면 다른 집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끝내 보수하지 못하고 이북동네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주민 대부분이 연로해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아 지금 이북동네에는 빈 집이 많습니다.
그래도 이북동네에는 그 시절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집들과 몇몇 주민분들의 이야기가 있어 한국전쟁의 아픔과 피난민들의 힘들었던 삶을 떠올릴 수 있게 해줍니다.
오늘날 깡깡이 작업 풍경
나무 널판(아시바 또는 족장)에 앉아 깡깡이질 하는 대평동 여인들(출처·국제신문)
나무 널판(아시바 또는 족장)에 앉아 깡깡이질 하는 대평동 여인들(출처·뿌리깊은나무 한국의 발견 부산편)
“대평동에는 7전8기의 깡깡이 아지매들이 있다.” (여성과 대평동)
1970~80년대 마을이 한창 수리조선으로 번성하던 무렵, 수리조선소 담장을 넘어 마을 전체로 울려 퍼지던 ‘깡깡깡’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깡깡이’ 는 수리조선소에 배가 들어오면 망치로 뱃전에 붙은 녹과 조개류를 떼어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때 ‘깡깡’ 소리가 난다 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깡깡이질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높은 배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작업해야 하는데다 작업 중 발생하는 소음과 진동, 먼지가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된 깡깡이질에 나선 이들이 바로 대평동의 중년 여인들 이었습니다.
대평동의 여인들은 가난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 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힘든 깡깡이질에 뛰어들었습니다. 일을 하다가 낙상사고를 당하거나 난청, 이명, 관절염 같은 직업병을 얻기도 했습니다. 당시 200명 정도이던 깡깡이 아지매가 기계의 발달로 현재는 10~2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20~30년 넘게 한 분야에서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깡깡이 아지매 모두는 한국 근대 산업화의 주역이자 대평동이 수리조선으로 이름을 날릴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주인공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깡깡이’이란 말은 마을 주민들의 근면함과 끈기를 상징하는 단어이자 마을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참고_김정하(근대산업화기 여성근로자의 산업민속 - '조선소거리'의 '깡깡이 아지매'를 중심으로)
드론으로 본 대동대교맨션
1963년 항공사진으로 본 대평동 모습과 대동대교맨션 자리(출처·부경근대사료연구소)
“80년 완공된 대동대교맨션은 부산 최초의 주공복합아파트이다.”
대평동 1가 1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대동대교맨션은 영도의 근현대사와 함께 한 자리입니다. 일제감정기에 부산은 물론 영도의 산업시설과 공장은 거의 일본인이 운영하였는데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부산의 선각자 박기종은 1909년 경에 이곳에 미국계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설립합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군이 사용하던 자리였고 이후에는 승리창고라는 대형 보세창고가 들어섰으며 1970년대까지 로프 등을 생산하는 각종 공장 및 업체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던 1978년 아파트 건설 공사를 시작해 1980년에 대동대교맨션 이 완공됩니다. 대동대교맨션은 주상복합아파트 로 1층 상가에는 조선관련 공장 및 부품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고 2층부터는 주택인 부산 최초의 주공복합아파트였습니다. 1층 상가에 입주해있던 조선관련 부품공장 및 업체들은 1970년대까지는 부품산업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여 일본산 부품을 구매해 판매했지만, 현재는 국산화된 부품을 만들어 팔고있습니다.
“과거 대평동에는 9가지 히트상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1916년~1926년까지 이뤄진 ‘대풍포매립공사’로 40,200평의 땅이 생기자 대평동에는 일본인 주택과 더불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 등을 제조하는 공장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메이드 인 대평동이라고 할 만 한 다양한 물품들이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 9가지를 뽑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금
1906년 현재 대평하나빌아파트 자리에 ‘허비제염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영도에 제염공장을 집중적으로 설립했는데 허비제염소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일본 어민들은 우리나라 동남해안에서 잡은 생선들 중 일부를 처분하고 남은 생선들을 대평동에서 나온 소금으로 바로 염장 처리했습니다. 대평동에는 염전이 없었지만 값싼 수입염을 원료로 해수에 녹인 뒤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허비제염소 외에도 현재 대평동 동아조선소 맞은편에도 재제염공장이 한 곳 더 있었다고 합니다.

성냥
1935년 8월 현재 대평동 1가 80번지에 있는 볼링장과 골프연습장이 함께 있는 건물 자리에 부산인촌주식회사라는 성냥공장이 설립됐습니다. 영도 주민들을 비롯해 부산 사람들은 부산인촌주식회사에서 생산했던 성냥통을 ‘불통’, 성냥개비는 ‘황개비’라 불렀습니다.

해산물
일제강점기인 1932년, 현재 대평동 간이선착장 자리에 해산물 가공 업체인 ‘동찬공영조’가 설립되었습니다. 1942년 기준 자본금이 5만엔 이상이었을 정도로 큰 규모의 회사였던 동찬공영조는 우리나라 동남해안에서 잡은 생선들을 대평동 선착장으로 가져와 가공하는 곳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현재 대평동 대동아파트 자리에는 ‘쌍화 주물’이라는 이름의 솥 공장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만든 솥으로 전 국민이 밥을 해먹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솥을 생산했던 곳입니다. 당시 작은 지역에 불과했던 영도 대평동에서 국민들이 생활하는데 가장 필요했던 물건을 만들었던 셈입니다.

로프(줄)
해방 이후 현재 대평동 1가 1번지인 대동대교맨션 자리에 로프 공장이 있었습니다. 선박에서 사용하는 로프를 주로 생산했다고 합니다.

간장
일제강점기 현재 대평동 마을버스 종점 부근에 간장 공장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대평동에서 생산하는 간장은 영도구와 중구, 동구, 서구에서 소비되었다고 합니다.

양조
현재 대평동 마을버스 종점 부근에는 일제강점기에 술을 만들었던 주정공장(양조장)도 있었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생산과 더불어 도소매업까지 했다고 합니다.

레코드
한국에서 최초로 레코드를 발매한 곳은 다름아닌 영도입니다. 황해도 출신 작사가 야인초(본명 김봉철)는 1946년 부산 영도구 대평동에 코로나 레코드사를 설립했습니다. 코로나 레코드에서 나온 대표적인 음반으로는 1949년 이숙희가 부른 ‘부산 부르스’가 있습니다.

석유
부산의 선각자 박기종은 1909년경 대풍포에 미국계 스탠다드 석유대리점을 설립합니다. 박기종은 영도의 지리적 장점과 활용도를 고려해 신식 조선소를 유치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미국계 스탠다드 석유 대리점을 설립하고 ?경영하면서, 육지와 영도를 연결하던 유일한 교통수단인 도선(渡船)의 연료사업을 통해 일제로부터 조선의 경제권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참고_배연한(부산 영도의 도시경관 변천 - 문화경관적 관점)
대평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업사 풍경
대평동에서 수리를 마친 대형 프로펠러
조선소에서 용접하는 기술자들
“대평동에선 10군데만 거치면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 (대평동의 수리기술자들)
대평동에는 조선소, 선박수리공업사, 부품공장 등 선박 건조와 수리에 관련한 모든 업체가 다 모여 있는 곳입니다. 특히 대평동에서는 운항 중 고장 나거나 낡아서 부서진 미세한 부품까지도 일일이 만들어서 교체해주기로 유명합니다.
1960년대에는 자체적으로 배를 만드는 기술이 부족해 일본에서 엔진 등 주요 부품을 수입해오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배들마다 부품이 다르고 여분의 부품을 구비하고 있기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수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평동 공업사의 기술자들은 주물로 만들고 기계로 깎고 다듬는 과정을 거쳐 어떤 부품이라도 똑같이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차츰 자체적으로 엔진을 만드는 기술까지 발달해 대평동 내에서 모든 선박 건조와 수리가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평동의 엔진, 기어, 펌프, 자바라, 목형, 주물, 전자기기, 스크루, 조선소, 수리업체 등 “적어도 10군데만 거치면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는 부단한 기술 개발로 자체 노하우를 터득한 대평동 선박수리기술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